은퇴하고 나니 하루가 길어진 게 아니라 제가 느려졌더라고요
은퇴하면 시간이 많아질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 시간보다 제가 하루를 쓰는 속도가 달라진 것 같아요.
예전에는 아침에 일어나서 일정 확인하고 아이 학교 보내고 일 처리하다 보면 하루가 그냥 지나갔는데, 요즘은 강아지 산책을 다녀와서 물 한잔 마시는 것까지 괜히 천천히 하게 됩니다. 처음엔 이게 좀 불안했어요. 남들은 바쁘게 사는 것 같은데 나는 이렇게 있어도 되나 싶어서요.
그래서 러닝도 시작하고 집에서 운동도 하는데, 운동 끝나고 샤워한 다음 소파에 앉으면 또 한참 멍하게 있습니다. 그런데 며칠 전 아이가 그러더라고요. 엄마 요즘 얼굴이 전보다 편해 보인다고요. 그 말 듣고 아, 꼭 뭔가를 계속 해야만 잘 사는 건 아니구나 싶었습니다.
물론 아직도 하루 계획표는 씁니다. 다만 예전처럼 빈칸이 생기면 실패한 기분이 드는 계획표는 아니고, 산책하고 장 보고 운동하면 체크하는 정도입니다. 은퇴가 일을 그만두는 것보다, 남이 정한 속도에서 내려오는 일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드네요.
가끔은 아무것도 안 한 날도 있었는데 저녁에 배우자랑 밥 먹고 강아지 발 닦여주고 나면 그것도 하루를 잘 보낸 거더라고요. 너무 늦게 알아서 그렇지, 하루가 꼭 꽉 차 있어야 괜찮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.
전국 공개 채널에 올라온 글이에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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